Drifting Histories, Undrifted Terrestrials
표류하는 역사, 표류하지 않는 대지의 것들(Terrestrials)
By Buhm Soon Park
Multiple histories crisscrossed the Korean peninsula in the twentieth-century. At the turn of the century, Korea – a more than five-hundred-year-old country known as Chosun – became a crucible of conflicts amongst imperial powers, old and new, near and far away, including China, Russia, Japan, France, Germany, UK, and US. Two international wars, the Sino-Japanese War (1894-95) and the Russo-Japanese War (1904-05), took place, and subsequently Japan emerged as the unrivaled force, which annexed Korea in 1910 as its colony. Korea was liberated at the end of World War II. Yet another ordeal immediately ensued as the country was divided at the 38th parallel, the line conveniently drawn between the United States and the Soviet Union for the military purpose of disarming the Japanese army. This temporary line became a reality with the 1948 establishment of two independent governments in the South and the North, which were engaged in the fierce civil war for three years starting in 1950. Thereafter, the newly drawn curvy line of the Demilitarized Zone (DMZ) became an epitome of the Cold War confrontation, and it still does even in the post-Cold War era.
글: 박범순
20세기에 진입할 무렵 한반도에는 다수의 역사가 교차했다. 오백 년 조선왕조는 중국, 러시아, 일본 등 주변 국가뿐만 아니라, 멀리 프랑스, 독일, 영국, 미국까지 합세하여, 구(舊)와 신(新)의 열강들이 경합하고 충돌하는 각축장이 되었다. 청일 전쟁(1894-95)과 러일 전쟁(1904-05)과 같은 국제 전쟁이 두 차례 발발했고, 여기서 승전한 일본은 독보적인 영향력을 차지해 조선을 식민지 속국으로 만들었다. 조선은 1945년 이차세계대전의 종결과 함께 해방되었지만 곧이어 북위 38선을 경계로 분단되는 또 다른 시련을 겪게 되었다. 미국과 소련이 일본군을 무장 해제하기 위해 임의로 그은 군사분계선인 38선은 1948년 남과 북에 독립 정부가 각각 설립되며 실질적인 정치적 경계선이 된 것이다. 이어 1950년에 시작한 3년간의 내전 끝에 비무장지대(DMZ)라는 새로운 분계선이 생겨났다. 남북을 가르는 DMZ는 냉전체제의 상징이 되었으며 탈냉전 시대인 오늘날에도 그 상징성은 유효하다.
글: 박범순
20세기에 진입할 무렵 한반도에는 다수의 역사가 교차했다. 오백 년 조선왕조는 중국, 러시아, 일본 등 주변 국가뿐만 아니라, 멀리 프랑스, 독일, 영국, 미국까지 합세하여, 구(舊)와 신(新)의 열강들이 경합하고 충돌하는 각축장이 되었다. 청일 전쟁(1894-95)과 러일 전쟁(1904-05)과 같은 국제 전쟁이 두 차례 발발했고, 여기서 승전한 일본은 독보적인 영향력을 차지해 조선을 식민지 속국으로 만들었다. 조선은 1945년 이차세계대전의 종결과 함께 해방되었지만 곧이어 북위 38선을 경계로 분단되는 또 다른 시련을 겪게 되었다. 미국과 소련이 일본군을 무장 해제하기 위해 임의로 그은 군사분계선인 38선은 1948년 남과 북에 독립 정부가 각각 설립되며 실질적인 정치적 경계선이 된 것이다. 이어 1950년에 시작한 3년간의 내전 끝에 비무장지대(DMZ)라는 새로운 분계선이 생겨났다. 남북을 가르는 DMZ는 냉전체제의 상징이 되었으며 탈냉전 시대인 오늘날에도 그 상징성은 유효하다.
(Figure 1. Caricature about the dispute between China, Japan and Russia over Korea, published in the first edition of Tôbaé, 1887. Source: Wikipedia)
(Figure 1. Caricature about the dispute between China, Japan and Russia over Korea, published in the first edition of Tôbaé, 1887. Source: Wikipedia)
(그림 1. 한국을 둘러싼 중일러 간 분쟁에 대한 캐리커쳐, 1887년 초판, 토바에(Tôbaé), 출처: 위키피디아)
(그림 1. 한국을 둘러싼 중일러 간 분쟁에 대한 캐리커쳐, 1887년 초판, 토바에(Tôbaé), 출처: 위키피디아)
No place symbolizes this drifting-in and drifting-out of multiple histories better than Cheorwon, a county (or a town within that country) right in the middle of the peninsula. Located between the 38th parallel and the DMZ, Cheorwon has seen the hands of its control changed from the Choson administrators to the Japanese colonial rulers to the North Korean authority to the South Korean counterpart. Japan’s colonial government not only turned it into a transportation hub linking the Western and Eastern cities of Korea, but also greatly increased the ground of its agricultural and mining industries for obvious goals of shipping the products to Japan mainland. The population grew almost six times from about 15,000 before 1910 to 87,000 in 1935, while its main street flourished with modern features of a theater, banks, schools, inns, and restaurants. Trading was brisk, and tourism-related business thriving. Tens of thousands of migrant workers and farmers were flowing in, as well as thousands of adventurous setters from Japan. This colonial landscape painted with the themes of industrialization, modernization, and Westernization is deceptive, as it does not reveal the emergence of a hierarchical social structure in Cheorwon, replacing the old order with the new one that put the Japanese on top.

The 1945 liberation completely shattered the colonial landscape and social order, but it also created conditions for perpetuating the practice of displacing people from their ways of thinking and living. The Soviets moved in and organized the Council of People’s Commissar. They carried out the land reforms under the principle of confiscation without compensation, distribution without condition. One resident recollected the dire situation that tenants had to face. He said: “Under the Japanese colonial ruling, tenants barely survived under the exploitative system of dividing the crops by 3 (tenants) to 7 (landlords). Under the communist ruling, a subtle competition was orchestrated among the famers by announcing who donated how much. . . It was hard to trick on crop yields for fear of self-criticism and censure.” The huge Soviet-style building, erected in 1946 for Worker’s Party Headquarters for Gangwon Province with cost and labor provided by local residents, shows the extent of the sweeping ideological drive. During the Korean War, Cheorwon was the most fiercely fought place until the very point of the armistice agreement in 1953. Its downtown was completely wiped out. There are now only remains of some buildings, including this headquarter, which fell into the South Korean territory just below the DMZ.
한반도의 한 가운데 위치하고 있는 철원은 이렇듯 밀려 들어오고 나가는 다수 역사의 표류를 가장 잘 보여주는 지역이다. 38선과 DMZ 사이에 자리한 철원의 행정권은 조선왕조, 일제식민정부, 북한을 거쳐 남한으로 넘겨졌다. 식민정부는 한반도에서 생산된 농산품과 광물을 일본 본토로 운송하려는 명확한 목적 하에 철도를 놓아 철원을 한반도의 동서를 잇는 교통 중심지로 구축하고, 철원 지역의 농지 확장 및 광산업 발전을 도모했다. 그 결과 1910년 이전에는 15,000명에 불과했던 철원의 인구가 1935년에는 여섯 배 가량 증가하여 87,000명에 이르게 되었다. 한편, 극장, 은행, 학교, 숙박업체, 식당 등 각종 현대 시설이 들어서면서, 철원의 시가지는 번영을 구가했다. 상거래가 성행했고 관광업 역시 번창했다. 수만 명의 노동자와 농민들이 철원으로 유입되었고, 포부를 품고 철원에 정착한 일본인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제 강점기 철원의 변모를 산업화, 현대화, 서구화로 미화하는 것은 기만적이다. 이는 철원에 새로 등장한 사회적 위계 구조의 속성을 은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은 일본인을 위계의 꼭대기에 놓는 새로운 질서를 구축해 구래의 질서를 대체하고자 했다.

1945년 해방을 맞이하면서 철원의 식민지 풍경과 사회 질서는 와해되었다. 하지만 철원 사람들은 또다시 새로운 사고와 생활 방식을 요구하는 조건에 놓이게 되었다. 북한을 통치하기 시작한 소련은 철원지역에도 인민위원회(The Council of People’s Commissar)를 조직해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원칙 하에 농지개혁을 단행했다. 한 농민은 소작농들이 처한 당시의 처절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일제 강점기에는 경작물에 대해 소작농과 지주 간 3대 7의 착취 구조에 시달렸다면, 누가 더 많이 기여하는지를 공표하는 공산주의 하에서는 농민들 간 미묘한 경쟁이 조장되었다 [···] 자아비판과 검열에 대한 공포로 수확량을 조작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지역민들의 노역과 모금으로 1946년 완공된 소련식의 웅장한 철원의 강원도 노동당사는 당시의 전폭적인 이념적 동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가늠케 한다. 한국 전쟁이 발발한 뒤 1953년 정전 협정이 맺어지는 시점까지, 철원은 가장 치열한 격전지였다. 시가지는 초토화되었으며,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건축물은 위 언급한 노동당사를 비롯해 몇몇 건물들이 전부다. 정전 협정 이후 철원은 비무장 지대 바로 하단에 위치한 한국의 영토가 된다.
한반도의 한 가운데 위치하고 있는 철원은 이렇듯 밀려 들어오고 나가는 다수 역사의 표류를 가장 잘 보여주는 지역이다. 38선과 DMZ 사이에 자리한 철원의 행정권은 조선왕조, 일제식민정부, 북한을 거쳐 남한으로 넘겨졌다. 식민정부는 한반도에서 생산된 농산품과 광물을 일본 본토로 운송하려는 명확한 목적 하에 철도를 놓아 철원을 한반도의 동서를 잇는 교통 중심지로 구축하고, 철원 지역의 농지 확장 및 광산업 발전을 도모했다. 그 결과 1910년 이전에는 15,000명에 불과했던 철원의 인구가 1935년에는 여섯 배 가량 증가하여 87,000명에 이르게 되었다. 한편, 극장, 은행, 학교, 숙박업체, 식당 등 각종 현대 시설이 들어서면서, 철원의 시가지는 번영을 구가했다. 상거래가 성행했고 관광업 역시 번창했다. 수만 명의 노동자와 농민들이 철원으로 유입되었고, 포부를 품고 철원에 정착한 일본인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제 강점기 철원의 변모를 산업화, 현대화, 서구화로 미화하는 것은 기만적이다. 이는 철원에 새로 등장한 사회적 위계 구조의 속성을 은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은 일본인을 위계의 꼭대기에 놓는 새로운 질서를 구축해 구래의 질서를 대체하고자 했다.

1945년 해방을 맞이하면서 철원의 식민지 풍경과 사회 질서는 와해되었다. 하지만 철원 사람들은 또다시 새로운 사고와 생활 방식을 요구하는 조건에 놓이게 되었다. 북한을 통치하기 시작한 소련은 철원지역에도 인민위원회(The Council of People’s Commissar)를 조직해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원칙 하에 농지개혁을 단행했다. 한 농민은 소작농들이 처한 당시의 처절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일제 강점기에는 경작물에 대해 소작농과 지주 간 3대 7의 착취 구조에 시달렸다면, 누가 더 많이 기여하는지를 공표하는 공산주의 하에서는 농민들 간 미묘한 경쟁이 조장되었다 [···] 자아비판과 검열에 대한 공포로 수확량을 조작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지역민들의 노역과 모금으로 1946년 완공된 소련식의 웅장한 철원의 강원도 노동당사는 당시의 전폭적인 이념적 동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가늠케 한다. 한국 전쟁이 발발한 뒤 1953년 정전 협정이 맺어지는 시점까지, 철원은 가장 치열한 격전지였다. 시가지는 초토화되었으며,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건축물은 위 언급한 노동당사를 비롯해 몇몇 건물들이 전부다. 정전 협정 이후 철원은 비무장 지대 바로 하단에 위치한 한국의 영토가 된다.
(Figure 2. Workers’ Party Headquarters in Cheorwon. Photo taken by the author in 2019.)
(Figure 2. Workers’ Party Headquarters in Cheorwon. Photo taken by the author in 2019.)
(그림 2. 철원의 노동당사. 2019년 사진)
(그림 2. 철원의 노동당사. 2019년 사진)

Only 15 percent of Cheorwon residents were able to come back. Many fled to the North during the war, and those who returned from the South could not live in the depleted old town because it was located inside the Civilian Control Zone. Only the daytime farming was allowed. The South Korean government announced the land reform law in 1957, which would compensate the land claimed by owners and distribute the unclaimed land to those who wished to cultivate. With this measure, a large number of tenants from around South Korea could come and have their own land. Starting from 1959, they were able to move inside the CCZ and build a village after getting a permission. In 1972, a large-scale “reunification village” was built with strong government support as a showcase to win in the psychological warfare with North Korea. To farmers, rice became their lifeline for raising their children and dreaming their futures.


The revitalization of rice farming in the DMZ area brought out one very distinctive change in Cheorwon: the increase in number of cranes, an endangered species, coming to inhabit or rest during the winter. This is perhaps a most interesting and unexpected entanglement among migratory birds, the land, rice, and residents. Cranes came to eat unharvested grains with little human intervention. This made Cheorwon known for cranes, attracting more and more tourists and conservationists. Korea’s National Institute of Ecology began to count and analyze the number of cranes coming every year. Famers were willing to and encouraged to leave more grains unharvested in the field. The political economy, sparked by rice and cranes and tourists, has also changed the landscape of Cheorwon with new buildings and roads.


This is a feature of the Anthropocene on the Korean peninsula. It is still surrounded by powerful (if not old-style imperial) countries, still divided by ideologically polarized political regimes, and yet still lived by terrestrials – humans and nonhumans. Though multiple histories are drifting in and out, these terrestrials are undrifted, coping with both existential opportunities and risks on the earth.

정전 협정 이후, 철원으로 돌아온 인구는 이전 인구의 15%에 불과했다. 많은 이들이 전시에는 북한으로 피난을 갔고 이중 일부는 남하했지만, 철원은 민간인 통제구역에 속해 있어 쇠락해 버린 이곳에서 생활을 하기는 어려웠다. 또한, 당시, 철원에서는 주간 경작만이 허용되었다. 한국 정부는 1957년 토지 개혁을 발표하여, 철원 지역 농지 소유주들의 토지를 보상했고 주인이 없는 농지는 경작하고 싶어하는 이들에게 분배했다. 이런 조치로 전국에서 소작농들이 와서 농지를 불하 받고 경작할 수 있게 되었다. 1959년부터 이들은 민간인 통제 구역으로 이주할 수 있었고 허가를 받아 촌락을 구성하기도 했다. 또한 대북 심리전에서 우위를 확보할 목적으로, 한국 정부가 선전의 일환으로 펼친 강력한 지원 덕분에, 1972년에는 대규모의 “통일촌”이 형성되었다. 이제 이곳의 농민들에게 쌀은 자녀를 양육하고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생명선이 된다.


비무장지대에서 벼농사가 복원되면서 철원의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두루미 개체수 증가이다. 두루미는 멸종위기종으로 겨울이 되면 서식지를 찾아 귀환한다. 이는 필시, 철새, 논과 벼, 주민들 사이에서 일어난 가장 흥미롭고 예상치 못한 방식의 얽힘이다. 두루미는 인간의 개입이 거의 없이 수확 후에 남겨진 곡식 알갱이를 먹는다. 이처럼 철원이 두루미의 고장으로 알려지게 되면서 철원을 찾는 관광객과 환경운동가의 수가 늘었다. 또한 한국국립생태원은 매년 귀환하는 두루미의 개체수를 세고 이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이에 농민들은 일부러 수확하지 않고 기꺼이 곡식 낟알을 더 남겨 두기도 하며 농민들의 이러한 행동은 장려되어 왔다. 벼와 두루미, 관광객이 촉발한 이와 같은 정치 경제는 신축 건물과 도로로 알려졌던 옛 철원이 아닌 완전히 다른 풍경의 철원을 낳았다.


이는 한반도 인류세의 특징이다. 한반도는 여전히 열강(구래의 제국주의 형태는 아닐지라도)에 둘러싸여 있으며, 양대 이념의 정치적 대결 구도로 분단된 상태이다. 그러나 여전히 대지의 것들(terrestrials), 즉, 인간(humans)과 비인간들(non-humans)에 의해 살아지며 지탱된다. 밀려 들어오고 나가며(drifting in and out) 표류했던 역사들 속에서도, 대지의 것들은 지구에서 생존의 기회와 위험에 대응해 가며 표류를 거부하고 자리를 지킨다.

정전 협정 이후, 철원으로 돌아온 인구는 이전 인구의 15%에 불과했다. 많은 이들이 전시에는 북한으로 피난을 갔고 이중 일부는 남하했지만, 철원은 민간인 통제구역에 속해 있어 쇠락해 버린 이곳에서 생활을 하기는 어려웠다. 또한, 당시, 철원에서는 주간 경작만이 허용되었다. 한국 정부는 1957년 토지 개혁을 발표하여, 철원 지역 농지 소유주들의 토지를 보상했고 주인이 없는 농지는 경작하고 싶어하는 이들에게 분배했다. 이런 조치로 전국에서 소작농들이 와서 농지를 불하 받고 경작할 수 있게 되었다. 1959년부터 이들은 민간인 통제 구역으로 이주할 수 있었고 허가를 받아 촌락을 구성하기도 했다. 또한 대북 심리전에서 우위를 확보할 목적으로, 한국 정부가 선전의 일환으로 펼친 강력한 지원 덕분에, 1972년에는 대규모의 “통일촌”이 형성되었다. 이제 이곳의 농민들에게 쌀은 자녀를 양육하고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생명선이 된다.


비무장지대에서 벼농사가 복원되면서 철원의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두루미 개체수 증가이다. 두루미는 멸종위기종으로 겨울이 되면 서식지를 찾아 귀환한다. 이는 필시, 철새, 논과 벼, 주민들 사이에서 일어난 가장 흥미롭고 예상치 못한 방식의 얽힘이다. 두루미는 인간의 개입이 거의 없이 수확 후에 남겨진 곡식 알갱이를 먹는다. 이처럼 철원이 두루미의 고장으로 알려지게 되면서 철원을 찾는 관광객과 환경운동가의 수가 늘었다. 또한 한국국립생태원은 매년 귀환하는 두루미의 개체수를 세고 이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이에 농민들은 일부러 수확하지 않고 기꺼이 곡식 낟알을 더 남겨 두기도 하며 농민들의 이러한 행동은 장려되어 왔다. 벼와 두루미, 관광객이 촉발한 이와 같은 정치 경제는 신축 건물과 도로로 알려졌던 옛 철원이 아닌 완전히 다른 풍경의 철원을 낳았다.


이는 한반도 인류세의 특징이다. 한반도는 여전히 열강(구래의 제국주의 형태는 아닐지라도)에 둘러싸여 있으며, 양대 이념의 정치적 대결 구도로 분단된 상태이다. 그러나 여전히 대지의 것들(terrestrials), 즉, 인간(humans)과 비인간들(non-humans)에 의해 살아지며 지탱된다. 밀려 들어오고 나가며(drifting in and out) 표류했던 역사들 속에서도, 대지의 것들은 지구에서 생존의 기회와 위험에 대응해 가며 표류를 거부하고 자리를 지킨다.

(Figure 3. White-naped cranes on a rice paddy during the winter. Credit: Center for Anthropocene Studies at KAIST.)
(Figure 3. White-naped cranes on a rice paddy during the winter. Credit: Center for Anthropocene Studies at KAIST.)
(그림 3. 겨울, 논 위의 흰목덜미 두루미. 출처: KAIST 인류세연구센터)
(그림 3. 겨울, 논 위의 흰목덜미 두루미. 출처: KAIST 인류세연구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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