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rmaid Physics: The Myth of Emilija Škarnulytė
인어 물리학:
에밀리아 스카눌리테의 신화
By Andrew Berardini
In dreamy films and submerging environments, the artist Emilija
Škarnulytė plunges us through the passages between worlds. With
camera in hand, she gazes through what we’ve done and where we’re going, offering visions of what creatures will come after and what our ruins might look like to them, the wonder they might have over our magic and ego, our power and hubris, the mysteries of a planet scarred and just possibly healed. Her videos possess a deep poetic and a ranging bravery that dive deeply into those so often hidden and remote places where humanity has wounded the skin of reality and opened a portal beyond.

She swims through the often invisible systems of economic
progress and military power, cosmic forces and geologic time,
ecological disaster and scientific order all set against a tradition
of symbolist landscapes where the evolving and mystical force of
life survives and thrives despite our species feverish drive towards
self-destruction. At first her visions are ghostly, disappeared myth-
ical cities in a landscape captured by the metaphysical dreams of

the painter and composer Čiurlionis in The Valley of the Missing
City (2012); in Korea, a fortune-teller reads the portents of the
largest ever development abandoned in Song Do Prophecy (2014);
the voguing theatrical magic of dragqueens dance in the sunken
city performed for a single adorable boychild in a ruined theatre,
its lusciously battered red leather seats hold an opulence beyond
repair in Latent River (2015), and our mermaid swims through that
nuclear submarine tunnel at Olavsvern burrowed into a mountain
range and abandoned by the Royal Norwegian Navy (seen in many
works but most clearly in Sirenomelia, 2017) and through the cos-
mic sounds collected at the Geodetic Observatory at Ny-Ålesund,

Spitsbergen, the most northerly permanent civilian settlement in the
world. Mystics and hybrids in the ruins civilization made for itself,
the ruins we are making now. When her work erupts into the world
in installations, we are not looking at landscapes — we are in them.
As she said in a recent interview, “I don’t work with screens, I work
with landscapes. All this media, these pixels are like clay and I like
to mold them and stretch them through time and space.” Mirrored
ceilings put us on the other side of the looking glass, as we lean
back on foam lounges cut like geometric relics of some advanced
but lost civilization.

In her collaborations with Canadian artist Tanya Busse called
New Mineral Collective, they imagine taking the notions of heal-
ing and care out of spas and into the scarred body of the planet, a
feminist act against mineral extraction and towards an “erotics of
counter-prospecting” as they titled one of their exhibitions. Calling
themselves the largest and least productive mining company in the
world, together they stake prospecting claims with the intention of
healing rather than mining, attempting to imagine and manifest
futures not of dystopian destruction (the logical conclusion of our
species extractivist obsessions), but one of healing, a sensual act that can start the process of recovery. A notion that offers an alternative to one mining company’s butchly explicit slogan the two artists found in their research: “Penetration is our Destination.” Through their actions and artworks, they make visible the invisible structures that gut the earth and with surreal pleasure imagine something else, a way beyond geotrauma. Perhaps our future isn’t a closed down reality, but a shift of imaginary possibilities, a prismatic scatter of what might be. It’s through these ruptures whether they be political upheaval or earth movers dismantling mountains, that we can see through the scrim that separates these different worlds and futures.

Certain of Škarnulytė’s solo works examine singular moments
in time and space. In Aldona (2012), she follows her blind grandmother around her hometown of Druskininkai as Aldona moves through the world with a spectral and angelic beauty, stopping to feel with her hands the hulking monuments leftover from the Soviet occupation of Lithuania. Aldona lost her sight in relation to the nuclear meltdown of Chernobyl and yet she lives to handle the monuments of the fallen empire who’s hubris took her sight. In Škarnulytė’s ongoing feature Sounds from the Desert, she transmits the story of musician Abshalom ben Schlomo, the Sun Ra Arkestra member and Black Hebrew Israelite in his own spacey travels through spirit and time, trying to find soul through ancient mysticism and Afrofuturism to move beyond the rupture of racism and violence that he witnessed growing up in what he calls “the United Snakes.” And a more recent project documenting the Utopian architect Aleksandra Kašubą in her final days before passing away amidst the choreographic curve of her own architecture in the New Mexican desert, after escaping the Nazis and then the Soviets in
her search to find a communal vision beyond hard angles.

But other pieces by Škarnulytė take places, moments, ruptures
between worlds and employ them as an imaginary cosmogony, rede-
ploying images throughout different works. Like broken tablets from
a dozen scattered and destroyed libraries from lost civilizations, her
mythology can exist in fragments, repeated over and again in different films. Vast chambers, walls lined with mirrored spheres reflect the rippling water of a scientific experiment at Super-Kamiokande Neutrino

Observatory in Japan appears in Mirror Matter (2017), but flickers into the screen in numerous works. Massive, pale satellite dishes nestled amidst the vast snowy mountains. Microscopy of infinitesimal creatures and spinning technical diagrams.

And there, the swoop of the mermaid's tail appears over and
again. And like Alice chasing the white rabbit, a mystic that sees a
swish of the mysteries, or a scientist who’s reached the edge of knowledge, we’re beckoned to follow. At the border crossings between worlds, this mermaid can reveal to us what lies beyond if we’re willing to see.

She is the link between the human and non-human, nature and culture, the conscious and the unconsious, the quantum and the classical, the documentary and the imaginary, the past and the future. Following her graceful swim through time and space, it’s easy to imagine no vestige of a beginning, no prospect of an end.
글: 앤드류 베라르디니

꿈 속 같은 영상과 물 속에 잠겨 있는듯한 분위기 속에서 에밀리아 스카눌리테는 여러 세계 사이의 통로를 통해 우리를 안내한다. 카메라를 손에 들고 그녀는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응시하며, 우리의 뒤를 이어 어떤 생명체가 나타날지, 우리의 폐허는 그들에게 어떻게 보일지, 그들은 우리의 마법과 자아, 권능과 자만, 그리고 상처받고 바로 치유되는 행성의 신비에 대해 어떤 경이로움을 느낄지에 대해 상상하게 한다. 그녀의 비디오는 깊은 시적 감성과 현실의 피부(the skin of reality)에 생채기를 내고 그 너머의 세계로 향하는 문을 열어 젖힌 은폐되고 외진 장소에 깊이 뛰어드는 용감한 기질을 은유한다.


스카눌리테는 상징주의적 풍경화의 전통과는 대조되는 방식으로 경제발전, 군사력, 우주적 힘, 지질학적 시간, 생태적 재앙, 과학적 질서 등 보이지 않는 체계들 사이로 유영한다. 상징주의자의 풍경화에는 인간종(our species)의 자기파괴를 향한 강렬한 충동에도 불구하고 진화하는 신비로운 생명력이 살아있고 번성한다. 얼핏 보면 그녀의 영상은 리투아니아 화가이자 작곡가 츄를료니스가 <잃어버린 도시의 계곡>(The Valley of the Missing City, 2002)에서 형이상학적 꿈을 통해 묘사한, 유령이 나올 것 같은 으스스한 도시풍경처럼 보인다. <송도의 예언>(Songdo Prophecy, 2014)에서 한국에서 점쟁이는 포기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대규모 개발의 전조를 예언한다. <잠재된 강>(Latent River, 2015)에서는 여장한 남자가 폐허가 된 극장에서 사랑스러운 한 남자아이를 위해 패션모델의 걸음걸이를 흉내내는 춤을 추고, 극장의 부드럽게 닳은 빨간 가죽시트는 화려함을 담고 있다. 그리고 산맥 속으로 파묻혀 있으며 노르웨이 해군이 방치한 올라프스번의 원자력잠수함 터널을 통해, 혹은 지구 상에서 최북단에 위치한 영구적인 거주지가 있는 스피츠베르겐의 나이 앨슨트 측지천문대에서 수집한 우주적 소리를 통해, 우리의 인어는 유영한다. (많은 작품, 특히 가장 명확하게 <시레노멜리아>(Sirenomelia, 2017)에서 보여주듯) 그녀의 작업이 설치의 형태로 세상을 향해 분출할 때 우리는 풍경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 “우리는 풍경 속에 존재한다.” 스카눌리테가 최근의 인터뷰에서 “나는 스크린으로 작업하지 않고 풍경으로 작업한다. 이러한 모든 매체와 픽셀이 내겐 흙과 같은 것으로 나는 이것으로 형태를 만들고 시공을 통해 확대시킨다.” 발전된 그러나 잃어버린 문명의 기하학적 유적 같이 잘린 휴게실에 기대어 있을 때 거울이 설치된 천장은 우리의 모습을 거울의 다른 면에 비춘다.


스카눌리테와 캐나다 작가 타냐 부스가 공동으로 작업한 <새로운 광물 콜렉티브>(New Mineral Collective)에서 이들은 전시 중 하나의 제목을 정하며, 광물채취에 저항하는 페미니스트적 행위나 “채광을 반대하는 일종의 성애학”(an erotics of counter-prospecting)으로서 지구의 상처 입은 육신로부터 치유와 보호의 개념을 상상한다. 스스로를 세계에서 가장 크나 비생산적인 광산회사라 부르며 이들은 채굴보다는 치유의 의도를 명백히 드러냈다. 이들은 반이상향적인 파괴(우리 인간종의 채굴하고자 하는 집착이 초래하는 당연한 논리적 귀결)가 아닌 치유, 회복의 과정을 시작하는 감각적인 행위의 미래를 상상하고 표현하고자 했다. 두 예술가가 그들의 탐사과정에서 발견한 한 광산회사의 거칠고 노골적인 구호는 “관통이 우리의 목적이다”(Penetration is our destination)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행위와 작업을 통해 지구를 파괴하며 초현실적 즐거움으로 무언가를 상상하며 지구가 겪은 외상을 뛰어넘는 방식으로 보이지 않는 구조를 보이게 만든다. 아마도 우리의 미래는 폐쇄된 현실이 아니라 가상적인 가능성의 변화, 가능성의 다채로운 확산이다. 이러한 균열이 정치적 격변이든 혹은 산을 해체하는 굴삭기이든, 우리는 다양한 세계와 미래를 분리시키는 막을 통해서 이를 볼 수 있다.


스카눌리테의 한 작품은 시공간에서의 특이한 순간을 탐색한다. <알도나>(Aldona, 2012)에서 스카눌리테는 그녀의 고향 드루스키닝카이 인근에서 그녀의 눈 먼 어머니의 여정을 따라간다. 그녀의 어머니 알도나는 유령이나 천사 같은 아름다움을 지닌 세계를 헤치고 나아가며 소련이 리투아니아를 점령한 이후 남겨진 거대한 기념비를 손으로 느끼기 위해 멈춰 선다. 알도나는 체르노빌 원전사고의 여파로 시력을 잃었으나 그녀는 무너진 제국의 영광(hubris)이 자신의 시각을 되돌려줄 것이라 믿으며 제국의 기념비를 매만지며 살아간다. 스카눌리테는 현재 진행 중인 작업인 <사막의 소리>(Sounds from the Desert)에서 선 라 아르케스르타(Sun Ra Arkestra)와 검은 고대 히브리인 단원(Black Hebrew Israelite)인 압살롬 벤 슐로모의 이야기를 전달하다. 그는 영혼의 여행을 통해 그가 “유나이티드 스네이크스”(the United Snakes)라 부른 곳에서 목도한 인종주의나 폭력에 의한 분열을 넘어 고대 신비주의와 아프리카미래주의를 통해 영혼을 찾고자 한다. 스카눌리테는 보다 최근의 작업에서 이상주의적 건축가 알렉산드라 카슈바의 말년을 기록했다. 카슈바는 나치와 소련으로부터 벗어나 경직된 시각을 넘어 공동의 비전을 추구하며 뉴멕시코 사막에서 실현한 건축물에서 춤추는듯한 곡선(choreographic curves)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스카눌리테의 다른 작품은 장소, 순간, 세계 사이의 균열 등을 가상적 우주생성론을 위해 이용하며 다양한 작품을 통해 이러한 이미지들을 재배치한다. 잃어버린 문명의 흩어지고 파괴된 도서관의 부서진 현판(broken tablets)처럼 그녀의 신화는 조각난 상태로 존재하며 여러 영상에서 반복된다. <그림자 물질>(Mirror Matter, 2017)에서 줄지어 끝없이 나타나는 구(spheres)로 가득 찬 거대한 방과 벽은 일본 슈퍼 가미오칸데 중성미자연구소에서 행해진 과학실험의 파문(rippling water)을 형상화한다. 육중하나 흐릿한 위성안테나가 눈이 덮인 거대한 산들 사이로 나타난다. 이는 극미동물을 현미경으로 관찰한 듯한 모습이나 회전하는 기술도해도(technical diagram)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곳에는 위에서 아래로 헤엄치는 인어의 꼬리가 반복해서 나타난다. 그리고 하얀 토끼를 뒤쫓는 앨리스, 휙 지나가는 신비를 목도한 신비주의자, 혹은 지식의 변방에 도달한 과학자처럼 인어는 우리에게 따라오라는 유혹의 손짓을 보낸다. 인어는 세계 사이를 넘나드는 경계에서 우리가 보고자 하는 것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드러낼 수 있다. 그녀는 인간과 비인간, 자연과 문명, 의식과 무의식, 양자물리학과 고전물리학, 기록과 가상, 과거와 미래를 연결한다. 그녀의 시공을 초월한 우아한 수영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시작의 흔적이나 끝의 가능성을 쉽게 찾을 수 없다.

글: 앤드류 베라르디니
꿈 속 같은 영상과 물 속에 잠겨 있는듯한 분위기 속에서 에밀리아 스카눌리테는 여러 세계 사이의 통로를 통해 우리를 안내한다. 카메라를 손에 들고 그녀는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응시하며, 우리의 뒤를 이어 어떤 생명체가 나타날지, 우리의 폐허는 그들에게 어떻게 보일지, 그들은 우리의 마법과 자아, 권능과 자만, 그리고 상처받고 바로 치유되는 행성의 신비에 대해 어떤 경이로움을 느낄지에 대해 상상하게 한다. 그녀의 비디오는 깊은 시적 감성과 현실의 피부(the skin of reality)에 생채기를 내고 그 너머의 세계로 향하는 문을 열어 젖힌 은폐되고 외진 장소에 깊이 뛰어드는 용감한 기질을 은유한다.

스카눌리테는 상징주의적 풍경화의 전통과는 대조되는 방식으로 경제발전, 군사력, 우주적 힘, 지질학적 시간, 생태적 재앙, 과학적 질서 등 보이지 않는 체계들 사이로 유영한다. 상징주의자의 풍경화에는 인간종(our species)의 자기파괴를 향한 강렬한 충동에도 불구하고 진화하는 신비로운 생명력이 살아있고 번성한다. 얼핏 보면 그녀의 영상은 리투아니아 화가이자 작곡가 츄를료니스가 <잃어버린 도시의 계곡>(The Valley of the Missing City, 2002)에서 형이상학적 꿈을 통해 묘사한, 유령이 나올 것 같은 으스스한 도시풍경처럼 보인다. <송도의 예언>(Songdo Prophecy, 2014)에서 한국에서 점쟁이는 포기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대규모 개발의 전조를 예언한다. <잠재된 강>(Latent River, 2015)에서는 여장한 남자가 폐허가 된 극장에서 사랑스러운 한 남자아이를 위해 패션모델의 걸음걸이를 흉내내는 춤을 추고, 극장의 부드럽게 닳은 빨간 가죽시트는 화려함을 담고 있다. 그리고 산맥 속으로 파묻혀 있으며 노르웨이 해군이 방치한 올라프스번의 원자력잠수함 터널을 통해, 혹은 지구 상에서 최북단에 위치한 영구적인 거주지가 있는 스피츠베르겐의 나이 앨슨트 측지천문대에서 수집한 우주적 소리를 통해, 우리의 인어는 유영한다. (많은 작품, 특히 가장 명확하게 <시레노멜리아>(Sirenomelia, 2017)에서 보여주듯) 그녀의 작업이 설치의 형태로 세상을 향해 분출할 때 우리는 풍경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 “우리는 풍경 속에 존재한다.” 스카눌리테가 최근의 인터뷰에서 “나는 스크린으로 작업하지 않고 풍경으로 작업한다. 이러한 모든 매체와 픽셀이 내겐 흙과 같은 것으로 나는 이것으로 형태를 만들고 시공을 통해 확대시킨다.” 발전된 그러나 잃어버린 문명의 기하학적 유적 같이 잘린 휴게실에 기대어 있을 때 거울이 설치된 천장은 우리의 모습을 거울의 다른 면에 비춘다.

스카눌리테와 캐나다 작가 타냐 부스가 공동으로 작업한 <새로운 광물 콜렉티브>(New Mineral Collective)에서 이들은 전시 중 하나의 제목을 정하며, 광물채취에 저항하는 페미니스트적 행위나 “채광을 반대하는 일종의 성애학”(an erotics of counter-prospecting)으로서 지구의 상처 입은 육신로부터 치유와 보호의 개념을 상상한다. 스스로를 세계에서 가장 크나 비생산적인 광산회사라 부르며 이들은 채굴보다는 치유의 의도를 명백히 드러냈다. 이들은 반이상향적인 파괴(우리 인간종의 채굴하고자 하는 집착이 초래하는 당연한 논리적 귀결)가 아닌 치유, 회복의 과정을 시작하는 감각적인 행위의 미래를 상상하고 표현하고자 했다. 두 예술가가 그들의 탐사과정에서 발견한 한 광산회사의 거칠고 노골적인 구호는 “관통이 우리의 목적이다”(Penetration is our destination)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행위와 작업을 통해 지구를 파괴하며 초현실적 즐거움으로 무언가를 상상하며 지구가 겪은 외상을 뛰어넘는 방식으로 보이지 않는 구조를 보이게 만든다. 아마도 우리의 미래는 폐쇄된 현실이 아니라 가상적인 가능성의 변화, 가능성의 다채로운 확산이다. 이러한 균열이 정치적 격변이든 혹은 산을 해체하는 굴삭기이든, 우리는 다양한 세계와 미래를 분리시키는 막을 통해서 이를 볼 수 있다.

스카눌리테의 한 작품은 시공간에서의 특이한 순간을 탐색한다. <알도나>(Aldona, 2012)에서 스카눌리테는 그녀의 고향 드루스키닝카이 인근에서 그녀의 눈 먼 어머니의 여정을 따라간다. 그녀의 어머니 알도나는 유령이나 천사 같은 아름다움을 지닌 세계를 헤치고 나아가며 소련이 리투아니아를 점령한 이후 남겨진 거대한 기념비를 손으로 느끼기 위해 멈춰 선다. 알도나는 체르노빌 원전사고의 여파로 시력을 잃었으나 그녀는 무너진 제국의 영광(hubris)이 자신의 시각을 되돌려줄 것이라 믿으며 제국의 기념비를 매만지며 살아간다. 스카눌리테는 현재 진행 중인 작업인 <사막의 소리>(Sounds from the Desert)에서 선 라 아르케스르타(Sun Ra Arkestra)와 검은 고대 히브리인 단원(Black Hebrew Israelite)인 압살롬 벤 슐로모의 이야기를 전달하다. 그는 영혼의 여행을 통해 그가 “유나이티드 스네이크스”(the United Snakes)라 부른 곳에서 목도한 인종주의나 폭력에 의한 분열을 넘어 고대 신비주의와 아프리카미래주의를 통해 영혼을 찾고자 한다. 스카눌리테는 보다 최근의 작업에서 이상주의적 건축가 알렉산드라 카슈바의 말년을 기록했다. 카슈바는 나치와 소련으로부터 벗어나 경직된 시각을 넘어 공동의 비전을 추구하며 뉴멕시코 사막에서 실현한 건축물에서 춤추는듯한 곡선(choreographic curves)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스카눌리테의 다른 작품은 장소, 순간, 세계 사이의 균열 등을 가상적 우주생성론을 위해 이용하며 다양한 작품을 통해 이러한 이미지들을 재배치한다. 잃어버린 문명의 흩어지고 파괴된 도서관의 부서진 현판(broken tablets)처럼 그녀의 신화는 조각난 상태로 존재하며 여러 영상에서 반복된다. <그림자 물질>(Mirror Matter, 2017)에서 줄지어 끝없이 나타나는 구(spheres)로 가득 찬 거대한 방과 벽은 일본 슈퍼 가미오칸데 중성미자연구소에서 행해진 과학실험의 파문(rippling water)을 형상화한다. 육중하나 흐릿한 위성안테나가 눈이 덮인 거대한 산들 사이로 나타난다. 이는 극미동물을 현미경으로 관찰한 듯한 모습이나 회전하는 기술도해도(technical diagram)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곳에는 위에서 아래로 헤엄치는 인어의 꼬리가 반복해서 나타난다. 그리고 하얀 토끼를 뒤쫓는 앨리스, 휙 지나가는 신비를 목도한 신비주의자, 혹은 지식의 변방에 도달한 과학자처럼 인어는 우리에게 따라오라는 유혹의 손짓을 보낸다. 인어는 세계 사이를 넘나드는 경계에서 우리가 보고자 하는 것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드러낼 수 있다. 그녀는 인간과 비인간, 자연과 문명, 의식과 무의식, 양자물리학과 고전물리학, 기록과 가상, 과거와 미래를 연결한다. 그녀의 시공을 초월한 우아한 수영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시작의 흔적이나 끝의 가능성을 쉽게 찾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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