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예술가의 “사회적 개입(social intervention)”을 때로는 당연시하고 때로는 하나의 연구-창작의 하위 주제로 고려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예술의 사회적 개입이란 예술이 정치 권력과 경제 자본의 영역으로부터 분화하는 동시에 그것들을 비판하는 독특한 실천으로 부상한 특정한 (유럽중심의) 지정학적 역사의 산물이다. 이로부터 실천적 예술가라는 개인적-집단적 행위자들이 부상했다.
예술의 사회적 개입 전략은 다양하게 전개되어 왔다. 정치적 활동의 직접적 도구로 쓰이는 프로퍼갠더나 액티비즘부터 예술계의 전통적 형식을 차용하면서 예술가의 의견이나 상상력을 담아내는 작품에까지 그 스펙트럼은 넓다. 전자의 경우 그 극단에서 창작자는 철저하게 익명으로 남을 것이며 후자의 경우는 서명을 통해 자신의 고유한 저자성을 부각시킬 것이다. 이글에서는 사회적 개입을 자신만의 고유한 전문성이나 혹은 직업적 소명으로 삼는 예술가들을 다룬다는 점에서 익명적 작업들은 논외로 할 것이다. 하나 짚고 넘어갈 것은 사회적 개입을 수행하는 예술가의 이력에서, 전자에서 후자로 이동하는 경우는 흔해도 후자에서 전자로 이동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는 점이다.
사회적 개입을 수행하는 예술가, 흔히 실천적 예술가라 불리는 모델은 서구에만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조선시대의 경우, “선비”들은 인문-예술 활동(서예)을 통해 지식생산과 창작을 결합했고 이를 통해 자신의 지위와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다. 하지만 지식인-예술가가 주도하는 학문-예술 활동의 권력 비판, 이를 통한 이상적 사회 건설의 기획은 국민국가와 자본주의의 동학 안에서 부상하고 변화해 왔다.
한국의 경우, 서구 식의 학술적이고 체계적인 예술론과 문화정책의 지원은 없었지만 20세기 전반 식민지 및 전후 시기, 신문과 잡지, 번역과 출판, 애호가들의 헌신과 투자가 예술장과 예술기관들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는 근대적 ‘문화국가’에 대한 전망과 제도적 기반을 다졌다. 주목할만한 것은 1950년대 이후 유지돼 온 예술가 집단과 국가 사이의 경합 및 동맹 체제였다. 한국의 예술가 집단은, 비판이건 호소이건, 국가를 향해 자신의 목소리를, 계몽과 근대화 과정에 예술이 개입해야 함을 천명하였다. 한국에서, 예술이 예술장을 구축하고 대학, 기업 등과의 관계 속에서 자율성과 영향력을 확장해갔음에도 국가는 문화정책을 다변화하며 여전히 예술생산과 향유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한 힘으로 기능하고 있다.
이 글은 한국(서구도 마찬가지) 상황에 주목하여, 예술과 국가 사이의 경합과 동맹 관계 속에서 (재)구성되는 예술의 사회적 개입과 그 역사적 변화를 추적하는 글이 아니다. 이 글의 목적은 소박하다. 나는 세 명의 예술가들- 한명은 개인 창작자, 둘은 콜렉티브의 멤버-과 나눈 인터뷰를 통해, 이들이 어떠한 상황 속에서 자신들의 실천적 예술을 도모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예술가들의 사회적 개입은 진공상태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물론 가장 중요한 요인은 예술가 자신의 자발적 의지와 창의성이다. 그러나 이들은 외부적 지지와 인정의 제도의 힘에 기대어야 하며, 이때 국가가 제공하는 기금은 중요한 지렛대 역할을 한다. 이 글은 예술가들이 공공기금을 활용하여 어떻게 예술의 사회적 개입이라는 실천을 전개해가는지, 또한 이때 어떠한 한계와 가능성에 직면하는지 간략하게 살펴볼 것이다. 또한 작가이자 연구자로서 내가 지니고 있는 경험과 기억과 지식을 참고하여 이야기를 풀어보고자 한다.
국가를 둘러싼 인력과 척력의 다이내믹 속에서 예술의 사회적 개입이 이루어지는 양상은 한국에만 특유한 현상은 아니다. 1960년대와 70년대 미국에서 급진적이고 실천적인 예술활동의 거점들로 작동했던 아티스트 런 스페이스들의 다수는 중앙 및 지역 정부가 제공하는 공적 기금을 주요 재원으로 삼아 기관을 운영했다. 다만 미국의 경우 민간재단에 대한 의존이 커 재원을 다변화하는 추세라는 것이 특징이다. 예컨대, 미디어 아트를 통한 사회적 개입을 주요 미션으로 삼는 뉴욕의 Eyebeam의 재원에서 연방예술기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그리 높지 않다. 그럼에도 비영리(not-for-profit) 단체라는 “법적” 지위는 매우 중요하다. 미국의 경우, 개인 예술가를 직접 지급되는 창작 지원금보다는 “단체”를 통해 예술가의 “프로젝트”를 지원하는 기금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기 때문이다. 아이빔의 상주작가였던 최태윤은 School for Poetic Computation이라는 교육기관의 운영자로 활동하며 기술, 예술, 사회적 실천을 결합시켰는데, 그는 자신이 정부의 규제를 피하기 위해 영리 모델을 선택했지만 후임 운영자들은 재원 확보를 위해 진지하게 비영리로의 전환을 고민하고 있다고 전했다.
지원금이 지원 대상에 가하는 제약을 일컫는 “단서가 붙은”(strings attached)이라는 표현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해돼야 한다. 이때 단서란 프로젝트의 이데올로기적 지향에서 수많은 단순 서류작업에까지 이른다. 사회적 개입을 수행하는 예술가와 예술단체는 이러한 단서들을 감수하기로, 혹은 감수하지 않기로 결정할 때, 비용과 정당성, 그 외의 현실적 제약과 편의 등을 고려해야만 한다. 여기서 제기되는 주요 질문은 공적기금이 그 액수와 무관하게 일종의 “승인의 상징(seal of approval)”으로 작용한다고 할 때, 그 정당화의 작용이 예술가로서의 지위와 작업에 어떤 영향을 미치느냐이다. 개념적으로 보자면, 한편으로는 “명예(honor)”가 될 수도 있고, 또 한편으로는 “주요 경력(track record)”이 될 수도 있다. 이 둘은 겹칠 수 있지만 개념적으로는 엄밀히 구별된다. 전자의 경우 국가의 승인이란 예술장, 혹은 예술장을 넘어서는 “위신(prestige)”과 연결된다면, 후자의 경우는 예술가로서의 평판을 쌓아가면서 작업을 계속 이어갈 수 있는 기반과 연결된다. 전자는 완료된 성취에 대한 “경축(celebration)”이라면 후자는 계속 이어지는 성취를 위한 “격려(encouragement)”라 할 수 있다. 후자의 관점에서 보면, 예술가들은 국가의 지원과 권위에 압도되기보다 그것을 전략적이고 도구적으로 활용하는 쪽이라 할 수 있다.
“언메이크랩”의 사례를 들어보자. 이들은 본래 시위 현장에서의 “만들기 워크숍”을 조직하거나 시위의 도구를 제작하는 등, 현장에 적합한 DIY 기술과 도구를 제작해온 컬렉티브였다. 최근 이들은 AI를 이용한 데이터셋 분석을 통해 비전형적인 이미지와 서사를 구축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예컨대 개발사업이 자연 환경에 미친 영향을 이미지 데이터로 수집한 후, 그것을 변형하여 새로운 생태적 픽션의 세계를 재현하는 것이다.
“최근에 했던 작업 같은 거는, ‘시시포스의 변수’라는 건데. 그 작업은 여주의 4대강 사업으로 만들어진 큰 모래산 있잖아요, 그 모래산에서 저희가 깨어진 돌을 가지고 수집해서 왔어요. 그래서 그 돌과 시시포스의 신화를 겹쳐서, 인공지능의 패턴 인식을 거쳐 전혀 다른 사물로 읽게 하는 그런 작업을 했어요(최빛나)”.
언메이크랩의 최빛나와 송수연은 예술학교 출신이 아니다. 이들은 각각 교육학과 저널리즘을 전공했다. 이들은 작업을 시작하면서 “내가 예술계, 미술계에 들어간다고 생각하고 활동을 한 적은 없다”(송수연), “미적으로 접근한다는 감각 자체가 별로 없었다”라고 증언한다. 그리고 이러한 배경은 이들에게 독특한 예술적 사회적 개입의 경로를 구축하는데 영향을 미쳤다. “(관심있는) 이슈를 사람들과 이야기한다는 구도를 통과해서… 늘 여러 가지 방법의 시도를 했던 것 같아요. 교육적인 방법이나 워크숍이기도 하고, 어떤 투어를 조직하기도 하고, 그런 과정들을 거치면서 좀 더 작업으로의 구조가 더 쌓여갔던 것에 가까워요.”(최빛나)
이들이 예술적 영향권 아래에 진입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 다양한 프로젝트와 인적교류를 통해서다. 그 결과 이들은 자신들의 정체성과 활동이 예술의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다고 여긴다.
“그냥 많은 사람들이 나를 예술가로 보기도 하고. 뭐 그러기도 하는데, 계속 그런 건 있어요. 그러니까 내 정체성이라는 거를 누구한테 어떻게 설명을 할 때, ‘언메이크랩에서 활동하고 있어요’는 되게 쉬운데, ‘예술가예요’ 이렇게 말하기도 애매한, 아직도 좀 그런 게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확실히 예술의 영역에 있기 때문이 아니고, 그래서 오히려 더 소통이 쉬워졌고 소통이 다양해졌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송수연)
이들의 사회적 개입 실천의 모호성은, 최근 융복합과 다학제를 강조하는 예술계와 문화정책의 경향과 맞물려, 독특한 “작업적 성격”으로 자리잡아간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이 기술적 알고리듬과 메커니즘을 작업의 기반으로 삼으면서, 과거 이들의 실천이 가졌던 “현장에서의 직접행동”으로서의 성격은 도리어 약화된다는 점이다. 그러나 자신들의 사회적 개입을 보다 지속 가능한 형태로 발전시키길 원하면서 이들은 모종의 전략적 선택을 취한다. 그것은 자신들의 실천을 보다 “예술적 알레고리”에 기대어 작업화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최근 점점 늘어나는, 예술과 기술의 융복합 프로젝트에 지원하는 공공기금을 받기로 한 결정과도 관련된다.
“예전에는 지원금 신청을 안 했거든요…작가 생활, 6년 7년 정도 하면서 단 한 번이 있어요. 근데 작년부터 마음을 바꿔 먹어서, 지원을 시작했어요. 1년에 한 건씩. 레지던스도 신청하고, 지원도 하고, 작품 수집 공고 올라오잖아요, 그런 데도 내고. 왜 그렇게 하기 시작했냐면은,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거예요. 활동가들은 관심 없고, 그래도 예술가들 중에서는 조금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있고…연구자들, 개발자, 공학자 이런 분들은 예술가들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뭐 한다니까, 놀러는 오고 좋아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크게 관심을 두지는 않는 거를 되게 많이 느꼈거든요. 지속적으로 뭔가 같이 하고 이렇게 하게 쉽지 않은 것들이 되게 많았죠…그래서 어느 순간 그러면서, 저희도 한쪽으로는 활동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작업을 하면서 지원금 신청을 하는 식으로 변화가 있었어요….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담론적이고 교육적인 자리를, 예술적 알레고리로부터 출발하는 게 꽤 괜찮은 방법이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래서 그런 이제 좀 변화를 가진 게 정말 좀 최근 일이거든요. 그러면서 작품도 좀 전시하게 딱 좋은 방식으로 만들기 시작하고.”(최빛나)
이들은 분명, 최근 미디어 아트의 제도적 지원을 둘러싼 동향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 한편으로는 예술가들이 지원금에 의존하여 ‘스펙 쌓기’에 전념하는 성향, 다른 하나는 대규모 기관과 정책 예산으로 진행되는 “엔터테인먼트형 미디어 아트’의 경향. 그러나 동시에 이들은 자율성과 탈권위적 감각을 유지하면서 “잡종의 배경”을 가지고 “예술계의 관행”에서 벗어나 “자기 공간과 관계”를 조직해가는 움직임에 주목한다.(최빛나) 이들은 비록 기금에 의존할지라도, 더욱 중요시 여기는 자원이 있는데, 그것은 연구-기반(research-based) 작업이 필연적으로 요구하는 연구자, 활동가, 개발자들의 지식 및 기술과 자신들의 사회적 개입 실천의 융합이며, 이들은 그것을 네트워크를 통해 자신들의 작업 속으로 녹여내고 실천적으로 풀어내고 싶어한다. 물론 이는 쉽지 않다.
“한마디로 네트워크가 다른 게 아니라, (다른 분야의 분들과) 얘기를 하면서 시작될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저희가 영향을 받았던 게 해외 작가들 중에서 연구자와 활동가와 예술가의 정체성을 같이 가지고 활동들을 조직하는 친구들이었어요. 근데 그 친구들도 자기들도 힘들기는 마찬가지라고 하지요. 그렇게 얘기는 하지만 제가 볼 때는 이 친구들은 자기들의 그라운드가 있고, 거기 안에서 어쨌든 계속 얘기를 해 나갈 수 있는 동력이 있더라고요. 그런 거에서 한국은 좀 쉽지 않은 거가 분명히 있는 거 같아요.”(최빛나)
언메이크랩은 늘어나는 공공 지원금과 다변화하는 지원 프로그램의 틈새를 공략하며 자신들의 사회적 개입 실천을 ‘예술 작업’의 형태로 지속시켜 나간다. 이때 역설적인 것은 확장되는 그들의 실천 속에서 그에 못지 않게 커가는 갈급함과 외로움이다. 이는 단순히 심리적인 차원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즉, 자신의 아이디어와 실천을 발전시키고 구현할 수 있는, 안정적인 예술가-연구자-활동가 네트워크에 대한 절실함이다. 이러한 연결은 이들의 사회적 개입 실천의 자율성을 담보하여, 이들의 작업이 국가가 지원하고 심지어 주문하는 단발성 프로젝트에 그치지 않도록 하는 거점으로 기능케 할 것이다.